유년기의 놀자귀신들

46. 북망산천 가는길!

창강_스테파노 2004. 11. 2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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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니 점점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아침 일찍 밭으로 갔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힌 막내 동생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뒤따라가자

동생이 등에서 풀쩍 풀쩍 뛰며 까르르 웃어댑니다.

“허리 넘어가야!”

허리 넘어간다며 야단을 쳐도 아랑곳없이 계속 장난을 걸었습니다.


오늘은 콩을 수확하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콩은 오전에 수확해야 콩알이 터져 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십니다.

그제 저녁에 지만이 아버지가 돌아 가셨기 때문인가 봅니다.


사업하다 망한 지만이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시고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노래 부르는가 하면 아무나 붙들고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습니다.

난 지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슬프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왜 슬픈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에 지만이 집에 놀러 갔을 때 지만이가 머리에 노란 삼베 모자를

쓰고 우리를 쳐다보는 눈에서 놀고 싶어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밤늦도록 마당의 천막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모여 화투를 치다말고

말다툼을 하며 싸우다가는 금방 또 둘러 앉아 화투를 칩니다.

상두꾼 우두머리가 풍경을 흔들면 화투치다 말고 모두 일어서서 장송곡을 부릅니다. 

“아~~아~~~  어~~~어 ~  월가리 넘자 너~얼 !”

처음에는 낮고 느린 속도의 노래가 점점 구슬픈 소리로 바뀝니다.

사람이 죽으면 밤중에 잠을 안자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세 번 노래를 부르고

가족들은 큰 소리를 내어 곡을 해야 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니 아까의 놀고 싶었던 생각이 달아나고 눈물이 납니다.

실은 하나도 슬프지 않았는데 지만이 할머니가 가슴이 찢어지게 통곡을 하시고

지만이 어머니가 서럽게 우시고 지만이도 따라 우니 나도 눈물이 나고 만 것입니다.

곡이 끝나자 언제 그리 슬펐느냐는 듯이 또다시 화투판이 벌어집니다.


“어이! 머여 시방! 나는 여섯끗이여!”

항상 검정 안경을 쓰고 다니는 아랫동네의 무서운 삼촌이 화투를 치다 말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반말을 해댑니다.

그러다가도 어르신들이 한마디 나무라면 농담인 것처럼 능글맞게 약을 올립니다.

아마 화투 칠 때는 그래야 하는 가 봅니다.


죄인처럼 우스꽝스런 모자를 쓰고 삼베옷을 입은 지만이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와 뜬눈으로 날을 새었습니다.

왜 사람이 죽으면 슬프고 우는지 잘 모르지만 잠이 잘 안 옵니다.

어제 밤잠을 설친 때문인지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깔끄럽습니다.


산자락 밭두렁 소나무 그늘에서 동생을 보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동생과 마주 앉아 놀아 줍니다만 녀석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입으로 가져갑니다.

심지어는 땅에 있는 개미도 입으로 가져갑니다.

개미들이 내 사타구니에도 동생의 사타구니에도 마치 굴속 끼어 다니듯 간지럽힙니다.


난 도저히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동생이 잠을 자주면 좋겠는데 잠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난 밭두렁의 땡감나무에서 홍시 감을 주어다가 동생에게 주고는 잠에 떨어졌습니다.

멀리 상여 소리가 들립니다.

지만이의 커다란 눈이 뭔가를 갈망하듯 불쌍하게 오버랩 되어 옵니다.


갑자기 누워있는 내 얼굴로 미끄덩거리는 게 달라붙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동생이 홍시를 먹다말고 내 얼굴에 범벅을 쳐버렸습니다.

녀석의 손과 얼굴에도 온통 홍시 감 범벅입니다.

동생 보기가 솔직히 공부하기도 보다 재미없습니다.

이건 감옥살이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새참을 드시러 오시자 멀리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가

바람결에 이어졌다 끊어졌다하며 들려옵니다.

필시 상여 뒤에는 지만이도 지팡이를 짚고 뒤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여!”

혼자말씀을 하시며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모습이 힘없어 보입니다.

하얀 상여에 매달린 습자지(1) 꽃이 나뭇가지에 걸려 길바닥에 떨어지고

만장(2)을 든 노인들이 뒤따라 걸어갑니다.

난 재빨리 억새풀이 만발한 산자락을 돌아 상여 옆에 따라붙었습니다.

우두머리 상두꾼이 풍경을 흔들며 선창을 하자 어제 저녁과는 달리 슬퍼집니다.


“이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가겠네!”

“어~야! 어~야! 월가리 넘자~ 너~얼~”

상여꾼들의 후렴이 구슬프기 그지없습니다.

“놀다가세 놀다가세! 북망산천 다 와가네!”

기분이 또다시 이상해지고 신이 나지 않습니다.


고개 숙이며 걷던 지만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눈을 내리깝니다.

“바보 같은 게! 힘이 없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상여꾼들을 보니 어제 저녁 화투치던 마을 어른들입니다.

그들은 어께에 맨 상여를 앞뒤로 버티며 갈 듯 말 듯 합니다.

갈려면 빨리 갈 것이지 힘들게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1)습자지 : 글씨 쓰기를 연습할 때 쓰는 얇은 종이로 주로 붓글씨 연습에 사용

2)만장 :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기(旗)처럼 만든 것


** 출상하는 날은 상여 속에 관을 얹어 습자지로 꽃 장식을 하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 장지로 가곤했다. 영구차가 없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망자의 넋을 위로하곤 하던 그 때는 상여꾼들이 노자를 받아 내기 위해 상여를 느리게 움직이는 장난도 섞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