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놀자귀신들

41. 메뚜기 잡던 날!

창강_스테파노 2004. 11. 1. 11:14

오늘은 왠지 신이 나지 않습니다.

제비들이 돌아가고 구름들도 돌아가면 하늘이 텅 비어버리거든요.

밭두렁에 고개 숙인 수수가 빨간 껍질을 벗고 하얀 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살랑대는 바람에 이따금씩 이파리를 흔들어대며 힘겹게

고개를 늘어뜨린 서숙(1)들의 모습도 불쌍해 보입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습니다.

춘식이도 지만이도 고무신 코만 보고 걷습니다.

조용한 하늘에 몇 점 구름만 우리를 내려다 볼뿐입니다.

논둑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메뚜기들이 우르르 몰려갑니다.

옆구리에 낀 책보에서 연필들이 달그락거리며 장난을 걸어옵니다.


책보를 어께에 동여매고 강아지풀을 뽑아든 우리는 메뚜기를 잡기 시작 했습니다.

아궁이 불에 굽는 구수한 냄새가 떠올라 벌써 입안에 침이 돕니다.

산두(밭벼) 잎에 붙어 있던 메뚜기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틀어 잎파리 뒤로 숨습니다.

녀석의 발가락이 내 눈에 보이는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재빨리 낚아채자 꾸물거리며 손안에서 빠져 나오려 합니다. 


목 줄기에 두른 테를 벌려 강아지풀에 꿰어 넣으니 입에서 검정 물을 뿜어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내손에도 춘식이 손에도 메뚜기 들이 채어 들어옵니다.

금세 강아지풀 한 두름이 가득 찼습니다.

대두병(2)을 가져올 걸 잘 못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강아지풀에 꿸 필요가 없는데...

“가위 바위 보!  보!  보!”

서글퍼졌던 기분이 어느덧 사라지고 우리들은 또다시 장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가위 바위 보로 메뚜기 따먹기를 하였습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지만이가 강아지풀에 꿰어진 메뚜기를 말없이 건네줍니다.

하지만 춘식이 녀석은 삼세번을 해야 한다며 우기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춘식이가 안줘도 말 못하지만 삼세번이라는 말에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결국 내가 이겨 메뚜기를 3두름을 갖고 사립문에 들어서니 마당에 놀던 닭들이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봅니다.

백구 녀석은 훌떡 훌떡 뛰며 혀로 내 볼테기(3)를 핥아 댑니다.

백구를 좋아하지만 녀석이 내 얼굴을 핥는 것은 제일 싫어합니다.

녀석이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동생의 똥도 잘 퍼먹기 때문이죠.


난 얼떨결에 메뚜기 한 두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수탉이 잽싸게 물고 닭장 옆 구석지로 달려가자 닭들이 우르르 쫓아갑니다.

내가 한 마리씩 빼서 나누어 줘야 할 텐데 자존심이 팍 상합니다.

“캥!”

백구를 발로 걷어차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꼬리만 흔듭니다.

순식간에 먹어치운 닭들이 또다시 엉덩이를 흔들며 달려와

마루에 앉아있는 나를 갸웃 갸웃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한 마리를 빼 던지자 와하고 달려갑니다만 힘센 수탉 차지입니다.

알도 못 낳는 것이 힘세다고 욕심만 잔뜩 부리는 꼴이 미워 죽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요령껏 수탉을 피해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괜히 메뚜기 따먹기를 했나 봅니다.

춘식이랑 모여서 아궁이 불에 구워 먹을 걸 후회가 됩니다..

닭들에게만 좋은 일시키고 나니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마루에 앉아 멀리 하늘을 보니 더 높아 졌고 텅 비었습니다.


1) 서숙 : ‘조’의 다른 이름

2) 대두병 : 한 되들이 유리병, 청주나 소주를 담는 병

3) 볼테기 : 볼의 방언


** 농약을 치지 않았던 그때는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메뚜기 알을 죽이기 위해 정월 보름날에는 논두렁에 불을 피울 만큼 많았다. 메뚜기를 담는 용기로는 무엇보다도 조그마한 자루에 대나무 대롱을 주둥이로 만든 것이 최고였고 큰 병을 이용하곤 했다. 그도 저도 없을 때는 귀찮지만 강아지풀에 꿰어 잡아오곤 했는데 우리들 간식거리로는 최고로 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