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놀자귀신들

36. 고구마 캐던 날

창강_스테파노 2004. 10. 9. 00:17
 

오늘은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밭에 갔습니다.

산 다랑이(1)에 심어 놓은 고구마 넝쿨이 아직 힘차게 뻗어있습니다.

서리가 내린 후 고구마 순이 힘을 잃어야 밑이 드는데 아직은 이른 편입니다.

맛보기로 한 두룩(2)만 헐어 캐기 시작합니다.


호미로 조심스레 두룩을 헐어내니 주먹만한 고구마가 얼굴을 내밀며

배죽히 웃고 불거져 나옵니다.

허연 물고구마를 골라 가마니에 쓱쓱 문질러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한 물이

입안에서 한바퀴 돕니다.


어머니는 담장처럼 둘러 서있는 옥수수 대에서 아직 늙지 않은 옥수수를 툭툭 따

바구니에 담으십니다.

머리에 두른 수건 속에 살짝 비치는 어머니의 콧날이 정말 예쁘게 생겼습니다.


“멋허냐? 덩쿨 짤라져야!”

우물우물 고구마를 씹으며 막대기로 호박잎을 두들기니 넝쿨 상한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어쩌다 한두 송이 핀 호박꽃을 보니 더 이상 호박이 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내가 막대기를 휘두르는 건 혹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무섭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무니! 호박 열었어! 늙은 호박!”

춘식이 누나 엉덩짝보다 더 큰 누런 호박이 푸더덕 똥을 퍼질러 놓은 듯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펄펄 눈 내리는 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박떡을 떠올리니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멀리 옥례네 소가 바리톤으로 게으른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고구마와 옥수수를 지고 작대기를 짚고 일어섭니다.

아버지 몰래 지게에 새끼줄을 매고 소 몰고 가는 시늉을 하며 뒤 따라 갑니다만

어머니는 알면서 모른 체 하십니다.

어느 틈엔가 우리 앞에 오순이 아버지가 나타나 걸어갑니다.


“정동양반!  밭에 갔다 오신게라우?”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더니 인사를 건넵니다.

지게에는 수많은 땅콩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난 새끼줄을 놓고 얼른 오순이 아버지 지게 뒤로 붙었습니다.


딸까 말까 망설이며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두 분은 지게를 바치고 담배를 꺼내 무십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멀리 당산나무 옆으로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집니다.


“면민 여러분! 낼 모레 추석날 저닉에 콩클대회가 있는디 많이 참석 해주시오!”

당산나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새마을 노래’ 사이로 이장의 목소리가 약방에 감초처럼

한마디씩 튀어나옵니다.

남들은 새도 쫒고 밭에 나가 바삐 움직이는데 언제 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의 담배연기가 바람에 실려와 캑캑대며 지게에 매달린 땅콩에 눈을 붙이니

오순이 아버지가 말씀을 하다 말고 생각난 듯 지게에서 땅콩을 한 움큼 따 주십니다.

우리는 왜 땅콩을 한번도 안 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1) 다랑이 :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으로 된 좁고 긴 논이나 밭

2) 두룩 : 두둑 또는 두렁의 방언


** 땅콩은 물이 잘 빠지는 모래 토질에서 잘 자란다. 일반 작물에 비해 수확량이 적어 심는 농가가 거의 없지만 설령 심어 놓아도 오다가다 서리해 먹으므로 심는 사람이 드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