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보러 가자”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우시장에 소 끌려가듯 따라 나섰다.
한때는 열심히 미사를 참례하였지만 냉담의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묵주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슬며시 책상 서랍에 넣어버렸다.
아직 나는 그 묵주를 낄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그 묵주는 서랍 구석지에 쳐 박혀 나를 기다려 왔지만
아직도 나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낮선 성당에 들어서니 미사를 준비 중인 학생들의 모습이 서울과 달리
활기를 띤다.
붉은색 제의를 입은 신부님의 모습을 보며 이방인처럼
서먹한 얼굴로 자리하였다.
오늘이 년 중 몇 주일이고 무슨 축일이지?
주보를 훔쳐보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 축일이다.
김대건 성인은 서른여덟의 젊으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우리 같은 범인들과는 달리 목표가 뚜렷한 삶을 살다가
짧은 생을 마친 것이다.
그는 버림을 통해 성인으로 다시 태어난 영원한 삶을 택했다.
내 삶은 어떠한가?
난 왜 증오하고 분노하며 용서하기를 꺼리는가?
용서하지 못한 삶은 고통이다.
묵상을 하는 동안 흐르는 올갠 연주가 가슴을 저민다.
인연이란 게 무엇일까?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파온다.
사람들은 영특하게도 버려야 할 인연과 간직할 인연을 구분할 줄 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인연은 비록 소중할지라도 버릴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번뇌하고 가슴아파한다.
월요일에는 진찰을 받으러 가야한다.
방정맞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사람은 병들고 늙어 흙으로 돌아가는데 나만은 그런 삶이 아니기를
강변한다.
왜 하필이면 나여야만 하는가 하고 억울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옆에 앉은 어머니와 아내는 무슨 기도를 올릴까?
틀림없이 월요일의 결과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나 또한 가족들의 얼굴을 한사람씩 떠올리며 그들의 안위를 빌지만
줄곧
내 머리 속에서는 인연을 맺어 왔던 얼굴이 맴돌며 떠나질 않는다.
그래 그런지 비가 오는 오늘 같은 날을 유독 좋아하지만
별로 와 닿지가 않는다.
개구리 뛰는 방향은 알 수 있지만 손톱 튀는 방향은 알 수 없다더니
내가 힘들 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왜 멀어져 가는 것일까?
난 항상 건배를 할 때 100살까지 살자며 잔을 부딪히곤 했다.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항하는 또 다른 강변이리라.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넘치는 삶을 빌며.......
060702